우리가 쓰는 말 중엔 실제 의미를 모른 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처구니'도 그 중 하나로 사전에 의하면 어처구니는 " (명사)상상 밖으로 큰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 용례) 어처구니없다 => <속어> 어이없다" 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사전상으로는 큰 물건이나 큰 사람을 가리키지만 실제로 어처구니는 50센티도 채 안되는 작은 것입니다.
경복궁같은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殿閣)이나 남대문같은 문루의 기왓지붕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나 갖가지 기묘한 동물들의 모양을 한 토우(土偶 : 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이를 '어처구니'라고 합니다. 이를 '잡상(雜像)' 또는 '상와(像瓦)'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어처구니의 수는 항상 홀수입니다. 옛날 중국 황제가 기거했던 건물에는 11마리의 어처구니가 있고, 세자의 경우는 9마리, 그 외에 격이 낮은 경우는 7마리로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특별히 이러한 규칙을 따 르지는 않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는 9마리, 경회루에는 11마리 등이 놓여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나 맨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고 그 다음부터는 동물의 모습입니다.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상와도(象瓦圖)'에 의하면 이 어처구니들은 삼장법사(三奬法師),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 이귀박(二鬼朴), 이구룡(二口龍) 등의 순으로 늘어서 있다고 합니다.



요는 어처구니의 대표주자가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들입니다. 삼장법사는 당나라시대 때 험한 천산과 사막을 건너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수행을 마친 후 대당서역기를 집필한 현장법사(玄奬法師)를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공을 깨닫는다'라는 뜻의 손오공(孫悟空), '여덟가지 계율'이란 뜻의 저팔계(猪八戒), '다섯가지 감정'이란 뜻의 사오정(沙悟淨). 이 세 동물이 삼장법사를 수행합니다. 이렇게 서유기 주인공들 이름에서 불교의 주요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나 동물들을 지붕 위에 세워놓은 데에는 악귀들이 감히 궁궐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어처구니가 삼장법사나 손오공 등 불교와 관련된 캐릭터들임데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정작 사찰에선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조의 궁궐과 성문에 많다는 점입니다.
'어처구니없다' 가 '어이없다'와 동일하게 사용된 유래는 궁궐, 또는 성문을 짓는 와장(瓦匠)들이 지붕의 마무리 일로 어처구니를 올리는데, 이걸 실수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없는 경우 '어처구니없다'란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어처구니를 궁전 건물과 궁궐과 관련된 건물에 한정해서 설치했기 때문에 아마 곧잘 잊어버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이 와장(瓦匠)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건축상의 아주 사소한 실수일지 모르지만, 왕이나 왕족 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주술상으로 의미있는 왕조(궁궐) 위엄과 건물 안전에 대한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회가 되서 고궁에 간다면 어처구니를 이젠 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겠죠?